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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묘지 여기로···' 경쟁 치열

〈속보> "죽은 마이클 잭슨이 산 사람 운명을 좌우한다?" 마이클 잭슨이 지난달 25일 5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급사한지 1주일이 지났지만 그가 안식을 취할 묘소는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채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가족들간의 이견이 드러나고 공식 장례일정도 차일피일 미뤄지며 잭슨의 영결식과 시신안치를 노리는 후보지들의 물밑로비가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팝의 황제'를 대표하는 묘지로 확정될 경우 세계적 관광 명소로 '영구적인 대박'을 터뜨리는 것은 물론 돈으로 따질수 없는 엄청난 홍보효과와 인근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킬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록&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가 묻힌 테네시주 멤피스의 자택 '그레이스랜드'의 경우 매년 지구촌 곳곳에서 60만명 이상이 꾸준히 방문하고 각종 기념품 판매 등을 통해 수천만달러의 이윤을 남기는 명소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현재 네버랜드.LA 한복판의 할리우드 포리스트 론.인디애나주 개리가 잭슨의 시신이 안장될 곳으로 꼽히고 있다. 이중 네버랜드는 1987년 잭슨이 직접 구입해 놀이기구.동물원을 갖춘 환상의 저택으로 꾸민뒤 2005년까지 살았던 인연으로 '가장 이상적인 장소'로 꼽힌다. 잭슨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은 '시카모어 밸리 랜치'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미 잭슨 가족이 "네버랜드에서는 어떠한 장례식도 없을 것"이라 발표한데다 관할 샌타바버라 카운티도 "화장하지 않은 사체를 거주지에 매장하는 것은 불법"이란 입장을 보여 제한이 많은 실정이다. 잭슨의 고향인 인디애나주 개리 역시 루디 클레이 시장이 직접 가족에게 "마이클이 고향땅에 묻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지리적으로 너무 낯설고 오랜 낙후지역이라는 이미지 극복이 걸림돌로 보인다. 반면 할리우드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게이블 등 할리우드의 수퍼스타들이 대거 안장돼 있는데다 관광사업에 민감한 LA시의 전폭적인 후원까지 받고 있어 가장 유력한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마약단속국도 '사인 조사' 마이클 잭슨의 급작스런 사망에 따른 의문점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마약단속국(DEA)도 LAPD의 요청으로 수사에 참여하게 됐다. DEA는 잭슨을 치료한 의사들과 이들이 처방한 약에 관련된 전문 자료를 제공할 방침이다. 또 잭슨이 약물을 남용하는 과정에서 마약밀매.불법 제조업자의 개입.약물남용에 대한 판단 근거도 제시하게 된다. 잭슨의 간호사 셰릴린 리는 "그는 최근 몇달동안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프로포폴 성분의 진정제 '디프리반'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봉화식 기자 bong@koreadaily.com

2009-07-02

마이클 잭슨 유언장 집행인은 어머니···유산은 가족과 재단에 나눠 기증

2002년 작성된 마이클 잭슨의 유언장이 1일 LA대법원에 제출됐다. 언론이 공개한 5장짜리 유언장(사진)에 따르면 잭슨은 어머니 캐서린을 세자녀의 후견인으로 지명하고 "가수 다이애나 로스를 2차 후견인으로 지명한다"고 밝혔다. '팝의 여왕'으로 불리며 여성 3인조 그룹 '슈프림스' 출신인 로스는 1960년대 말 최고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잭슨 5'를 소개한 이래 잭슨의 음악인생에서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잭슨의 유산은 어머니 40%.세 자녀에 40%.'마이클 잭슨 가족 재단'에 20%씩 나눠 지급되도록 적혀있다. 그러나 관계가 무척 나빴던 아버지 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간호사 출신의 두번째 부인 데비 로우에게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한편 법원은 6일 양육권 관련 소송 첫 심리를 열 예정이다. 2차 부검도 차이 없어 한편 마이클 잭슨의 2차 부검결과도 1차때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일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은 "2차 결과는 친척들의 요구로 비밀부검을 실시한 검시관에 의해 어머니 캐서린의 자택에서 전달됐다"고 보도했다. 가족 변호인 브리안 옥스먼은 잭슨의 몸에 "독특하고 큰 흉터와 상처"가 있다고 전했다. 전기작가 '그는 동성애자' 폭로 영국 ‘데일리 메일’은 1일 “잭슨은 의심의 여지없는 게이였다. 1993년 13세 소년 조던 챈들러와 2003년 13세 소년 개빈 아르비조에 대한 성추행 혐의를 받았지만 소년보다 남성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잭슨의 비공식 전기작가 이언 헬퍼린의 말을 인용, “그는 젊은 남성 취향의 동성애자였다”고 전했다. 헬퍼린은 “잭슨은 25일 사망하기 직전에도 두명의 남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할리우드의 웨이터와 장래가 유망한 젊은 배우로 두 사람 모두 젊은 남성”이라 밝혔다. 그는 또 “웨이터는 잭슨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잭슨과 사랑에 빠졌다며 둘이 찍은 사진도 내게 보여줬다”며 “잭슨은 라스베이거스서 건설 노동자와 사랑에 빠져 익명으로 여자 가발을 쓰고 싸구려 모텔에 잠입하기까지 했다”고 충격 폭로했다.

2009-07-01

[뉴스 속 뉴스] 특별한 걸음이 필요하다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는 뭐니 뭐니 해도 '문워크(Moonwalk)'다. 걷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잭슨의 걸음'은 기기묘묘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분명 앞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몸은 뒤로 움직였다. '걷는다'는 고정관념을 깬 이 신기한 걸음에 온 세상이 열광했다. 문워크의 출현은 '듣는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바꾼 신호탄이었다. 잭슨을 전설로 만든 것은 문워크 뿐만이 아니었다. '워크맨(Walkman)'이 있었다. 소니가 30년전 오늘(7월1일) 발매한 손바닥만한 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도 문워크 못지않게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예 음악의 개념 자체를 바꿨다. '음악은 실내에서 듣는 것'이란 상식이 깨졌고 '음악을 갖고 다니며 듣는다'는 개념을 창출했다. 그 인기는 엉터리 영어였던 '워크맨(일본식 조어)'을 권위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시킬 정도였다. 이렇게 8.90년대 세상을 진일보(적어도 음악면에서는)시킨 동력이 '걸음(walk)'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변화는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는 평범한 진리도 떠오른다. #. 문워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인 '코카콜라'를 위협한 적이 있다. 경쟁사인 펩시가 마이클 잭슨과 광고계약을 맺자 펩시콜라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84년과 86년엔 펩시가 코카콜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황한 코카콜라측은 '뉴 코크'를 개발해 출시했다. 하지만 사태는 악화됐다. 골수팬들은 "기존의 코카콜라가 아닌 펩시 맛을 흉내냈다"며 강력히 비난했다. 출시 이후 2달여 동안 무려 40만통의 항의 전화에 시달린 코카콜라측은 결국 손을 들었고 전통 기법대로 만든 'Classic Coke'을 출시했다. 지금도 코카콜라 캔에 써 있는 이 문구는 남을 어정쩡하게 따라한 최악의 선택에 대한 반성문이다. #. 워크맨의 아성은 엉뚱하게도 '흰색 이어폰'으로 무너졌다. 90년대 말 음원을 다운로드받아 음악으로 재생시키는 MP3플레이어가 출현했고 마침내 2001년 애플사의 아이팟이 나오자 워크맨은 밀리기 시작했다. 아이팟은 워크맨보다 더 작고 카세트테이프를 갈아끼울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이한 행운도 뒤따랐다. 아이팟이 고심끝에 선정한 흰색 이어폰이 '트렌드'가 된 것이다. 이전까지 이어폰은 어두운 색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흰색 이어폰을 낀 사람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으로 인식됐고 그들은 어김없이 아이팟을 선택했다. 20년 이상 독주하며 달콤한 세월을 보냈던 워크맨은 그 걸음을 중단했다. 한 해의 절반이 지났다. 개인.단체.회사 모두가 절반의 후회를 바탕으로 다시 한 걸음(워크)을 내디뎌야 할 때 '두 개의 워크(문워크.워크맨)가 던져주는 교훈은 각별하다. 우선 남과 달라야 한다. 기존 생각을 뒤바꿔야 한다. 문워크처럼 남들이 앞으로 걸을 때 뒤로 걷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후퇴의 의미가 아닌 방향성의 문제다) 초창기 워크맨처럼 남들이 음악은 집에서 편안히 듣는다고 생각할 때 복잡한 거리에서 음악을 들면서 집의 편안함을 느끼겠다는 역발상도 중요하다. 또 코카콜라 사례에서 보듯 자부심(때론 고집)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힘들 때 일수록 잘 된 누군가를 따라하려고만 한다. 멋지게 들리지만 벤치마킹이란 것도 사실 따라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모방은 결코 승부수가 아니다. 누구나 뛰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요즘 '달에서 걷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2009-06-30

[윌셔 플레이스] 마이클 '모타운' 잭슨

1960년대는 비틀스를 앞세운 '영국의 침공'으로 미국의 팝 뮤직이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다. 이 무렵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려 낸 건 '모타운'(Motown)의 흑인 음악. '모토'(자동차)와 '타운'의 합성어로 디트로이트의 별명이다. 당시 모타운이 배출해 낸 스타들은 다이애나 로스와 수프림스(3인조 여성보컬 그룹) 스티비 원더 등 아무리 팝송에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대중음악의 '전설'들이다. 이들은 비틀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런던에 상륙해 검은 돌풍을 일으키며 영국의 팝계를 점령하다시피 한 것. 비틀스의 공격에 역습으로 맞불을 놓았던 셈이다. 모타운의 성공신화. 알고 보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과 무관치 않다. 창업자 베리 고디는 부품들이 생산라인에서 조립돼 새차가 나오는 것처럼 톱스타들을 만들어내는 게 꿈이었다. 고디는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2층짜리 집을 사들여 '모타운 레코드'란 회사를 차렸다. 재능있는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조립'돼 '캐딜락'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할까. 어찌 보면 모타운의 음악은 도시의 산업화가 이뤄낸 산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빌보드 차트(인기 순위) 톱 10에 오른 모타운의 히트송은 무려 110 여곡. 숫자로만 봐도 모타운의 위력이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70년대 들어서 모타운의 영광을 한껏 드높인 인물은 마이클 잭슨. 한마디로 모타운의 세계화를 이끈 미국의 아이콘이었다. 모타운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모타운이 흑인의 뿌리인 재즈와 블루스만 고집했다면 반짝하고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흑인의 음악을 백인의 팝에 접목시킨 게 성공의 계기가 된 것. 소울과 가스펠 송 R&B(리듬과 블루스)를 섞어 놓는가 하면 사이키델릭까지 영역을 넓혔다. 흑인의 목소리로 백인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은 모타운. 흑ㆍ백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이른바 '모타운 사운드'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낸 것이다.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대중의 귀와 입 눈을 즐겁게 해 준 모타운. 어느새 '우리는 하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민권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타운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모타운의 역사적 기여를 인종통합에서 찾는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모타운의 마케팅 전략은 '키스'(KISS). '바보야 단순하게 만들어'(Keep It Simple Stupid)를 모토로 내걸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을 도입해 팬들과의 '입맞춤'에 성공한 것. 그러니 모타운은 히트곡의 산실이 될 수 밖에. 1980년대 초 모타운의 본고장 디트로이트는 일본차에 밀려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오일 쇼크로 인해 사람들은 소형차를 선호하는 데도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는 중ㆍ대형차 생산만을 고집해 소비자들과의 '입맞춤'에 실패한 때문이다. 그래서 '빅 3'가 진작에 모타운의 'KISS' 전략을 본땄더라면 구제금융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올해는 '모타운 레코드'가 설립된지 꼭 50주년을 맞는 해다. 영국의 '침공'을 막아내고 흑과 백의 인종화합에 기여한 모타운.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타계와 함께 모타운도 자동차 산업처럼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잭슨의 비극적인 죽음과 빅 3의 참담한 몰락…. 이제 역사의 한 챕터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09-06-29

마이클 잭슨, 4년전에도 숨질뻔···형이 발견 응급처치

25일 LA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4년전에도 똑같은 증세로 콜드워터 캐년의 자택에서 숨질뻔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팍스 뉴스는 29일 "당시 집에 있던 형 랜디가 우연히 기절한 마이클을 발견 이웃 친구 의사에게 연락해 응급처치로 소생시켰으며 친구는 마이클의 방에 쌓여있던 엄청난 분량의 약 처방전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 보도했다. 가족들 역시 2001년부터 잭슨의 급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팍스 뉴스는 어머니 캐서린이 마이클에게 "엘비스 프레슬리가 42세에 어떻게 죽었은지 건강문제를 제발 염두에 둬달라"며 애걸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반면 마이클이 5살때부터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춤 훈련을 시켰던 '비정의 아버지' 조 잭슨(사진)은 천재 아들이 유명을 달리한지 사흘밖에 되지않은 28일 LA의 흑인 연예방송(BET) 시상식장에 와 만면에 여유있는 미소를 띤채 사진촬영에 응해 대조를 보였다. 조는 "우리 아들은 샌타바버러 네버랜드에 묻히진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주변의 반발을 부르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LA카운티 검시소의 부검 결과 잭슨의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골이나 다름없고 머리털도 거의 없이 가발을 쓴 대머리였다는 영국 타블로이드 '선'의 보도는 완전한 거짓이라고 미국의 연예매체 'TMZ닷컴'이 주장했다. 잭슨의 사망을 가장 먼저 특종 보도했던 TMZ닷컴은 "잭슨의 몸을 살폈던 LA카운티 검시소 관계자가 영국 언론의 해당 보도가 정확하지 않으며 일부 내용은 완전 오보라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선'의 보도에 따르면 사망 직후 체중계에 달아본 잭슨의 몸무게는 웬만한 여성보다 훨씬 가벼운 115파운드(약50kg)에 불과했으며 텅빈 위장 안에서 정체불명의 수많은 알약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또 엉덩이와 허벅지 어깨에는 마약성 진통제 투약으로 보이는 수많은 주사 바늘 자국이 여기저기 나있었다고 보도했다. 한편 마이클의 모친 캐서린은 고인의 세자녀에 대한 양육권 청구소송을 제기 자신을 잭슨의 유일한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해줄 것으로 LA법원에 요청했다. 캐서린의 변호인은 "간호사 출신인 첫 두아이의 생모 데비 로가 평소 아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 그녀가 양육권을 가지면 결과적으로 해로울 것"이라 주장했다. 봉화식 기자 bong@koreadaily.com

2009-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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